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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거짓 균형’ 너머

다산바람 2022. 5. 12. 10:40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거짓 균형너머

하워드 진 달리는 기차 위에 중립은 없다로 보는 교육

 

 

 

정치적 중립은 가능한가?

20세기 중반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로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를 시작됐다. 다른 한 편으로는 브레이크 없이 달리는 기차와 같이 전 세계 패권을 쥐어가는 과정으로도 볼 수 있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정치적 중립을 지켜야 한다는 슬로건 아래 양심을 버리고 체제에 순응하는 가식적인 평화의 세상을 살아갔다. 그런 상황 속 송곳처럼 길게 삐져나온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이 있었다. “미국 원주민들에게 있어 콜럼버스와 그의 부하들은 영웅이 아니라 약탈자에 불과하다.”는 말로 민족 자긍심에 고취되어 있는 미국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주는 교육자로 유명해졌다. 불편함을 주고자 했던 말이 아니라 다른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한 지극히 교육적인 발언이었다.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행위를 세 가지로 구분했다. 먹고 사는 과정에서의 생존 노동(Labor)’, 흥미와 적성을 살리는 창작 노동(Work)’, 대의와 공동체를 위한 시민 노동(Action)’. 이 중 세 번째 시민 노동(Action)은 정치적 행위로 해석될 수 있다. 첫 번째와 두 번째의 행위를 더 효과적이며 효율적으로 하기 위해서 또는 공동체 실현을 위해 세 번째의 정치적 행위로서의 노동은 중요하게 다뤄져야 한다.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는 말이 지극히 정치적이다!”라는 말이 있다. 상상계와 상징계를 거쳐오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온 관념으로서의 정치가 과연 중립적일 수 있을까? 개인, 세력, 국가가 정치적 중립을 외친다면 위의 하워드 진의 주장처럼 반드시 비판적 성찰을 통과한 자신만의 견해와 정치적 관점을 가져야 한다.

 

학교에서 정치의 중립성의 실태

한국사회 속 대부분의 학교 교사는 국가의 미래를 책임지는 교육의 핵심주체인 공무원으로서 특정한 정치세력에 속해 사익을 추구하며 공익에 반하면 안 된다. 교사가 교육하는 학생들은 객체로서 교사의 소유물이 아니다. 고로 교사는 자신의 특정 정치적 견해를 강요해서는 안된다.

하지만 간과되지 말아야 할 점이 있다. 교사의 정치적 중립성을 강조하는 것은 또한 교사가 한 인생을 살아오면서 형성된 세계관으로서의 정치적 이념을 부정하고 기계적 중립을 말하는 것과 같다. 기계적 중립은 사회적으로 균형 지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양쪽 의견이 균형을 이루는 것처럼 보이게 해 거짓된 균형을 만들어 어느 특정 세력이 이익을 독차지 하게 한다. 국가는 이런 기계적 중립을 강요하여 국가의 위선을 가리고 국민들을 자유 민주주의라는 이름하에 혐오와 차별 세력을 나누고 경제성장이 곧 개인과 가정의 평화를 불러온다는 미명하에 자본주의 체제 유지를 위한 부품으로서의 삶에 순응하게 만들었다.

하워드 진은 가르칠 때 자신의 정치적 발언이 문제가 되지 않음이 내가 하얀 석판, 즉 때묻지 않은 지성에 내 견해를 강요한다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다. 학생들은 내 수업에 들어오기 전 오랜 시간 종안 정치적 이념을 주입받았기 때문이라고 역설한다. 하워드 진의 교수법은 거짓된 균형을 만들지 않는 살아있는 관계로서의 교육을 만들어 낸다. 기존의 체계에 반문하여 문제제기 하는 것은 마치 외출타기 선수가 좌우 번갈아 가며 균형을 잡는 것처럼 보인다. 장기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에서 좌우 흔들거림은 창조적 긴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과연 한국의 학교 교육은 위와 같은 중요한 쟁점들에 대해 중립적일 수 있을까? 기계적 중립을 고집하기 보다는 흔들리는 정치적 관계창조적 긴장에서 더 나은 길을 모색할 수 있지 않을까?

 

- 인헌고등학교 사례

20195월 서울 관악구 인헌동의 인헌고등학교에서 일부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특정 사상을 강요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크게 페미니즘과 반일운동 및 조국 옹호 강요 사건으로 요약될 수 있다. 고등학교 내 성평화 동아리활동이 반페미니즘적 서적 구입을 반대하는 교사가 동아리 담당교사를 그만두게 되면서 폐쇄를 놓고 성평화 동아리 측과 학교 측이 갑론을박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보수 단체들의 공세 속에서 교장이 항복하며 동아리는 존치되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그로부터 몇 개월 후 20191017일 교내 달리기 대회에 반일 및 불매운동 구호가 적혀 있는 포스터를 들고 참여하라는 교사의 지시에 한 학생은 항의하는 뜻으로 대북송금 종북좌파라고 적었다. 이후 교사와 개별면담을 하게 되는 사건을 시작으로 선동자로 지목된 학생의 퇴학 얘기가 흘러나오면서 불거졌다. 평소에도 조국 사태와 관련해서는 가짜뉴스니 믿지 말라고 선동했다는 증언도 나왔다고 한다.

하워드 진은 내가 사랑하는 것은 조국, 국민이지 어쩌다 권력을 잡게 된 정부가 아니라고 한다. 어떤 정부가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린다면 그 정부는 비애국적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사랑은 당신으로 하여금 당신의 정부에 반대할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마찬가지로 학교에서 교사를 포함한 학교 측이 민주주의 원칙을 저버렸다면 이것을 반대하는 것이 옳다. 자칭 민주시민교육을 하겠다는 교사가 비민주적인 방식으로 페미니즘과 반일운동을 강요했다면 이는 비판받아 마땅하다. 인헌고등학교 성평화 동아리와 학생수호연합은 이번 사건으로 대중 행동 속에서 자신들의 힘을 자각했고 또 낡은 질서를 흔들 수 있다면 언젠가 무너뜨릴 수 있다는 정치적 효능감을 경험했을 것이다. 정치적 올바름을 떠나서 민주시민으로서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방법으로서 말이다. 반대로 교사들에게 있어서 민주시민교육은 수직적인 방법이 아닌 수평적인 구도에서 시작됨을 받아들여야 한다. 설사 학생들의 시각이 잘못되었다고 보이더라도 주입하고 교정하려 할 것이 아니라 현재 쟁점이 되고 있는 부분에 대해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할 수 있는 장을 열어주는 방식의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 모의선거 사례

'청소년참정권확대운동본부(www.18vote.or.kr)'는 전국 조직으로 교육감선거 연령 16세로 하향, 모의투표 법제화 등 청소년들의 정치 참여를 학습하고 활성화 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청소년(후배시민)이 교육정책과 학교운영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는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교육감 선거에 참여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제기의 핵심이다.

정치적 중립이 중요하다는 이유를 가진 세력들은 교사의 가치관이 아이들의 정치적 관점에 심각한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우려한다. 당연하다. 어떤 시대든지 자신의 권리에 눈을 떠 의식화된 사람들은 조직을 구성하고 정치적인 세력으로 등장해 자신의 목소리를 만들어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영국, 독일, 프랑스, 미국 등 대부분의 국가에서 정당 활동 연령을 제한하는 법률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당 활동과 선거운동의 자유를 가로막는 연령 제한은 이미 정치활동에 참여하고 있는 청소년의 행위를 불법으로 만들고, 있으면서도 없는 존재로 만드는 일이다. 하워드 진의 시대에 흑인들을 정치적 주체로 인정하지 않았던 것처럼 교육에 있어서 후배시민들이 교육의 주체로 서지 못하게 하는 것은 정당하지 않다. 최소한 교육감 선거에 있어서만큼은 당사자들의 권리로서의 참정권을 인정해주는 세상이 도래해야 할 것이다.

 

너머 보이는 정의

20세기 중반의 미국은 인종차별과 전쟁에 대해 문제의식 없이 국가의 입장에 순응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하워드 진은 이런 세계에서 법의 지배는 현상을 있는 그대로 유지하는 기능을 한다고 말했다. 또한 변화의 과정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정의를 위해 법을 어기는 게, 시민 불복종 행동을 벌이는 게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시민 불복종운동은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했다. 절대로 억압이나 폭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지속적인 투쟁을 벌이는 조직화된 세력이 있어 무시할 수 없는 힘을 발휘할 때만 국가 권력이 그들의 목소리를 정책에 반영하게 되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고 한다. 전통적인 표현 방식으로는 잘못된 일을 바로잡지 못하는 시기에 양심적 시민들이 참여한 항의로서 말이다.

 

교육이 도덕적 갈등의 현실과 마주할 때

하워드 진에 따르면 정치적 균형을 지켜야 한다는 전통체제의 (은행저축식)교육은 단지 새로운 세대로 하여금 낡은 질서에서 적당한 자리를 찾도록 준비시키는 과정일 뿐, 그 질서에 문제를 제기(문제제기식 교육)하는 건 올바르지 않게 여긴다고 한다. 그래서 진은 실천과 강의를 뒤섞고(프락시스), 교육은 우리 시대의 중요한 쟁점들에 관해 중립적일 수 없다고 주장한다. 나아가 역사가 잘못 흘러가고 있을 때 중립을 지키는 것은 그 잘못에 동조하는 행위라고 꼬집었다. 독일 나치 시대에 미친 운전자가 행인들을 치고 질주할 때, 목사는 사상자의 장례를 돌보는 것보다는 핸들을 뺏어야 한다.”는 말로 유명한 나치 독일 시절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했었다. 법과 정의의 갈림길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켜서 만들어 낸 결과는 악의 평범성을 보여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밖에는 없다. 어느 쪽을 편드는 것이 정의인지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하워드 진은 스펠먼에서 보낸 7년의 기간을 이렇게 고백한다. “가장 즐겁고, 흥분되고, 교육적이었던 순간들이었다. 나는 학생들이 내게 배워 간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학생들에게서 배웠다.” 또한 교육이 세계의 도덕적 갈등의 현실과 마주할 때 비로소 가장 풍부하고 생생해진다는 스펠먼 시절의 교훈을 확인시켜 주었다.”고 한다. 학교 교육의 주체들이 정치적 중립에 매몰되지 않고 거짓 균형 너머로 나아간다면 우리도 진과 같이 고백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당한 질서 속 정의에 대한 목마름을 느끼는 사람들은 서로 연대했고 함께 우물을 파서 물을 길어 올려 갈증을 해결했다. 한국사회에서도 이런 방식으로서 살아있는 교육을 실천한다면 늘 대선과 총선을 치루면서 만신창이가 되어 정치 혐오증을 낳은 사회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을까? 권력에 순응하는 기계적 중립 보다는 자기 목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도덕적 갈등과 현실이 충돌할 때 발생하는 어려움과 고통 속 창조적 긴장으로 더 나은 민주시민 양성이 가능할 것이라고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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