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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프락시스’가 세상을 구원한다 본문
불편한 ‘프락시스’가 세상을 구원한다
- 파울로 프레이리 『페다고지』로 본 실천
불편하지 않은 프락시스는 존재하는가?
국민의힘 당대표 이준석과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이하 전장연) 상임공동대표 박경석의 토론이 화제다. 이준석은 전장연을 향해 “시민의 발을 볼모로 해서”라며 비장애인 다수와 장애인 소수의 대결 구도로 갈랐다. 또한 “시위로 출퇴근 지하철을 지연시키는 것은 불법적이고 비문명적인 방식”이라며 혐오적 언어를 구사한다. ‘억눌린자들에게 그들이 억압받고 있는 상황에 대한 비난과 죄의식을 가르치는 것’이 본질인 ‘지배 이데올로기의 역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억압자의 세련된 언어는 불편한 대중의 혼란을 깔끔하게 정리해주고 자기기만적 자유를 얻을 수 있게 한다. 이런 방식으로 ‘침묵의 문화’는 강화된다.
반대로 박경석은 20년간의 투쟁에도 변함없이 립 서비스만 제공한 정치인, 공무원들에게 사과를 받는 것을 시작으로 진정성 있는 변화를 끌어내기 위해 고투한다. 당사자로서 장애인의 눈으로 ‘세상읽기’한 내용을 토대는 ‘앎으로서의 실천(프락시스)’을 살아내며, 자기 목소리를 온 몸으로 끊임없이 외칠 수 있었다. 억압자의 프레임 속 프락시스는 위태로울 수밖에 없는 것 아닐까?
전태일 : 저항으로서의 프락시스
1970년 평화시장에서 20대 청년 전태일. 창문이 없어 햇빛도 들어오지 않는 좁은 공간에서 하루 16시간이 넘는 노동착취를 견디며 피를 토하면서도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해서 쉬지 못하는 동료들을 보며 탄식했다. 그는 근로기준법 해설서를 정독하다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게 된다. 재단사들을 모아 학습동아리 ‘바보회’를 만들어 노동법에 대해 문제제기식 교육으로 토론했다. 억압자들의 ‘지배 이데올로기의 언어’를 인식하며 의식화된 실천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 결국 적발되어 직장에서 쫓겨나는 신세가 되고 말았지만 현실과 타협하거나 권력에 순응하지 않았다. 노동자가 목이 터져라 외쳐도 듣지 않는 억압자들을 들을 수 있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전태일은 일기(1970년 8월 9일)에서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 무고한 생명체들이 시들고 있는 이때에 한 방울의 이슬이 되기 위하여 발버둥 치오니 하느님, 긍휼과 자비를 베풀어주시옵소서.”라고 썼다. 노동자 인권이 지켜지는 인간화된 세상을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우는 극단적 행위(Action)로 궁극적 프락시스를 보여주었으며 이 시대의 성인(聖人)이 되었다.
불편함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비판적 낙관주의의 연대
2001년 장애인 노부부가 지하철 리프트를 이용하다 사망하는 사건으로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시작되었다. 당시 비장애인들에게 불편함을 초래하는 시위였는지 모르지만 그 결과로 지금의 교통약자인 노인과 아동들은 지하철 엘레베이터와 저상버스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더 나아가 교육권과 노동권 등 장애인의 포괄적 인권을 획득하고자 ‘출근시간 지하철 탑니다’라는 이름으로 ‘문제제기식’ 저항운동을 시작했다. 전태일이 이슬이 되기 위해 자신의 몸을 불태워 근로기준법을 화형시켰던 그 의식과도 같은 몸부림의 소리일 것이다.
전장연을 중심으로 한 당사자들의 프락시스를 정치적 중립을 지키겠다고 가만히 두고 보는 것은 억압자들의 ‘허구적 관용’을 그대로 두는 것이다. 모두가 방치한 ‘침묵의 문화’는 또 다른 ‘전태일’이라는 희생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자유의 공포’로 질끈 감았던 눈을 떠야 할 때이다. 비판적 낙관주의의 불편한 연대가 세상을 구원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자. 한 방울 이슬이나 순식간의 불꽃이 아닌 연대의 마중물 되어 ‘더 나은 세상’이라는 희망을 퍼 올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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